미국 기업들이 인공지능(AI) 반도체와 클라우드 시장에서 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유럽연합(EU)이 자체 AI 연산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존 슈퍼컴퓨터와 ‘AI 팩토리’를 유럽 전역에 배치한 데 이어, 차세대 대규모 AI 모델을 개발할 수 있는 ‘AI 기가팩토리’ 구축 사업까지 본격화하고 있다.
유럽고성능컴퓨팅공동사업(EuroHPC JU)은 지난 7월 AI 기가팩토리를 구축·운영할 사업자 컨소시엄을 선정하기 위한 입찰을 시작했다. 사업자는 오는 11월 12일까지 제안서를 제출할 수 있다.
AI 기가팩토리는 대규모 AI 모델의 개발과 학습, 추론에 필요한 컴퓨팅 자원을 한곳에 집적하는 시설이다. EuroHPC는 각각의 기가팩토리가 현재 유럽의 가장 강력한 AI 팩토리보다 최소 3~4배 많은 최신 AI 프로세서를 갖추도록 요구하고 있다. 대규모 연산장비뿐 아니라 고용량 저장장치와 네트워크, 보안 환경, 에너지·수자원 효율성까지 구축 조건에 포함됐다.
19개 AI 팩토리 구축…중소기업에도 슈퍼컴퓨터 개방
유럽의 AI 인프라 확대는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유럽에서는 19개 AI 팩토리와 13개 AI 팩토리 안테나가 구축되고 있다. AI 팩토리는 AI에 최적화된 슈퍼컴퓨터를 기반으로 대학과 연구기관뿐 아니라 스타트업, 중소기업, 산업계가 대규모 AI 연산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다.
EU와 EuroHPC 참여국들이 AI 팩토리와 관련 시설에 약속한 공동투자 규모는 26억 유로를 넘어선다. 지난해 추가로 선정된 시설들은 체코·리투아니아·네덜란드·루마니아·스페인·폴란드 등에 들어서며, AI 인프라가 일부 국가에만 집중되지 않도록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있다.
단순히 컴퓨터를 설치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각 시설에서는 기업과 연구자에게 연산자원뿐 아니라 AI 모델 개발을 위한 기술지원, 데이터와 소프트웨어 이용, 교육 프로그램 등도 제공한다.
특히 자체적으로 대규모 GPU 서버나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기 어려운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주요 지원 대상으로 설정돼 있다.
프랑스는 슈퍼컴퓨터 기업 ‘Bull’ 직접 인수
회원국 차원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3월 아토스 그룹이 보유하고 있던 슈퍼컴퓨터 업체 Bull의 지분 전량을 인수했다. 거래의 기업가치는 최대 4억400만 유로로 책정됐다.
프랑스 재무부는 Bull 인수를 고성능컴퓨팅과 AI·양자기술 분야의 기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설명했다. Bull은 슈퍼컴퓨터와 고성능 서버, AI 소프트웨어 및 양자컴퓨팅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민간기업 인수에 직접 나선 것은 AI 경쟁에서 연산 인프라를 단순한 정보기술 설비가 아니라 전략산업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EuroHPC 역시 현재 프랑스에서 차세대 엑사스케일급 슈퍼컴퓨터 ‘Alice Recoque’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의 JUPITER와 함께 유럽 최초의 엑사스케일급 시스템으로 분류된다.
핀란드에는 차세대 AI 슈퍼컴퓨터 ‘LUMI-AI’
북유럽에서도 대규모 AI 컴퓨팅 인프라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EuroHPC는 지난 8월 Bull과 계약을 체결하고 핀란드 카야니에 AI 전용 슈퍼컴퓨터 LUMI-AI를 설치하기로 했다.
LUMI-AI에는 AMD의 차세대 Instinct MI430X GPU와 6세대 EPYC 프로세서가 사용된다. 핀란드를 비롯해 체코·덴마크·에스토니아·노르웨이·폴란드가 참여하는 LUMI AI Factory가 이를 활용할 예정이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는 별도의 AI 슈퍼컴퓨터 ‘HammerHAI’가 구축되고 있다. 이 시스템에는 엔비디아의 Blackwell GPU와 Grace CPU 등이 적용돼 AI와 머신러닝, 데이터과학 분야에 활용될 예정이다.
‘유럽 AI 자립’의 역설…핵심 GPU는 미국 기업 의존
다만 유럽이 컴퓨팅 인프라를 확대한다고 해서 곧바로 완전한 기술 독립을 달성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구축되는 유럽의 주요 AI 슈퍼컴퓨터 상당수에도 엔비디아와 AMD 등 미국 기업의 GPU와 CPU가 사용되고 있다. 독일 HammerHAI에는 엔비디아 GPU가, 핀란드 LUMI-AI에는 AMD의 GPU와 CPU가 탑재된다.
때문에 EU의 현재 전략은 모든 핵심 반도체를 당장 유럽산으로 대체하기보다는 연산시설과 데이터, 운영기술, 소프트웨어 및 이용환경을 유럽 안에 확보하는 단계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EuroHPC도 반도체 프로세서부터 소프트웨어와 응용 프로그램, 전문인력까지 유럽 자체 슈퍼컴퓨팅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한 연구개발 사업을 별도로 추진하고 있다.
시설 확대보다 실제 이용 성과가 관건
앞으로는 막대한 공공투자가 실제 산업 경쟁력으로 연결되는지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전망이다.
슈퍼컴퓨터를 설치하는 것과 이를 이용해 경쟁력 있는 AI 모델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U가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 연산자원을 개방하는 것도 이러한 간극을 줄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또 대규모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과 냉각용 자원을 필요로 한다. EuroHPC가 기가팩토리 입찰 조건에 에너지 효율과 물 사용 효율, 순환경제 원칙을 포함한 것도 인프라 확대에 따른 비용과 환경 부담을 고려한 조치다.
유럽은 이제 슈퍼컴퓨터 구축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AI 모델 개발에 필요한 대규모 연산능력을 공동 인프라로 확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다만 공공투자로 확보한 연산능력이 유럽 기업의 실제 AI 서비스와 산업 경쟁력 향상으로 얼마나 이어지는지, 그리고 미국산 첨단 반도체에 대한 의존도를 어느 수준까지 낮출 수 있는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